ABF 기판 완전 해부 — 엔비디아·테슬라가 3.7조원을 건 '조미료 필름'의 물리학
AI 칩 밑의 기판을 해부한다. 아지노모토 95% 독점의 배합 기술과 역사, SAP 공정과 수율의 곱셈, 휨의 물리, 닛토보 T-glass 이중 병목, 2027~2028 공급갭 전망, 그리고 유리기판이 ABF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까지. 엔비디아·테슬라의 삼성전기 3.7조원 공동투자가 출발점이다.
30초 요약
- 결론부터: AI 가속기의 출하를 결정하는 것은 이제 GPU 다이도, HBM도 아닌 그 밑의 기판이다. 그리고 그 기판의 절연 필름은 일본의 조미료 회사 아지노모토(Ajinomoto)가 95% 이상을 쥐고 있다.
- 2026년 10월 21일 삼성전기와 엔비디아가 세종·부산에 FC-BGA 전용 라인을 공동 투자하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공식 발표했다. 10월 22일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엔비디아(약 2.6조원)와 테슬라(약 1.1조원)가 삼성전기 증설에 총 3.7조원 규모의 자금을 댄다. 칩 회사가 '기판 공장'에 돈을 대는 시대가 됐다.
- 수요의 산수는 잔인하다. 대형 AI 기판 1장은 일반 기판보다 면적이 약 3.5배, ABF 층수는 약 3배라 필름 소비량이 약 10배다(아지노모토 2025 통합보고서). 이비덴 기준 AI 기판 1장이 공장에서 차지하는 공정 부하(SAP load)는 2024년 대비 2026년 1.8배, 2028년 2.5배가 된다.
- 공급갭 전망은 기관마다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모건스탠리는 2027년 9.3%, 2028년 13.7%의 공급 부족과 2027년 25% 이상의 가격 인상을 본다. BofA는 2026년 7%, 2027년 14%, 2028년 19%로 더 비관적이다.
- 유리기판은 ABF를 죽이지 못한다. 유리는 기판의 '코어'만 바꾸고, 그 위의 빌드업 층은 여전히 ABF 필름이다. 2030년대에도 아지노모토의 목줄은 남는다.
이 글은 10월 17일에 발행한 「ABF 기판 공급난」 분석의 기술편이다. 지난 글이 증설 경쟁과 마진이라는 '돈의 흐름'을 다뤘다면, 이번 글은 필름의 화학, 공정의 물리, 수율의 산수, 그리고 이중 독점의 구조까지 기판 그 자체를 해부한다.
프롤로그: 칩 회사가 기판 공장에 3.7조원을 대는 이유
2026년 10월 21일, 베를린 GTC에서 삼성전기와 엔비디아의 파트너십이 공식 발표됐다(삼성전기 발표, 디일렉 보도). 골자는 세 가지다. 첫째, 양사가 공동 투자해 삼성전기 세종·부산 사업장에 AI 반도체 패키지기판(FC-BGA) 전용 생산시설을 구축한다. 둘째, 삼성전기는 2026년부터 다년간 엔비디아의 AI 연산 칩셋용 기판과 데이터센터 네트워크 스위치용 기판을 공급한다. 셋째, 공급 물량은 연평균 두 자릿수 이상 성장해 2028년에는 삼성전기 전체 패키지기판 생산능력의 상당 부분을 엔비디아가 차지한다.
여기에 기판 안에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와 실리콘 커패시터(Si-Cap)를 내장한다는 대목이 붙는다. 초고속 연산에서 발생하는 전력 노이즈를 칩 바로 밑에서 잡겠다는 것으로, 세계 최대 MLCC 제조사이면서 FC-BGA를 만드는 삼성전기만 할 수 있는 조합이다. 장덕현 삼성전기 사장은 "첨단 FC-BGA 제조 경쟁력과 독보적인 고신뢰성 MLCC 기술력을 결합하겠다"고 했고, 데보라 쇼퀴스트 엔비디아 운영 담당 부사장은 "기판 공급 파트너 네트워크를 넓히고 생산능력을 추가 확보하겠다"고 했다.
다음 날인 10월 22일, 로이터는 매일경제 보도를 인용해 자금의 실체를 전했다. 엔비디아 약 2.6조원, 테슬라 약 1.1조원, 합계 3.7조원(약 28억 달러) 규모의 고객 자금이 삼성전기 세종 공장 증설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테슬라는 세종에 전용 라인을 짓고 2029~2033년 5년간 자율주행·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용 AI 반도체 기판을 받는 구조로 보도됐다. 삼성전기가 9월 28일에 발표한 6.78조원 투자 프로그램(세종 4.27조원, 베트남 하이퐁 2.51조원) 중 세종 몫의 상당 부분을 고객이 대는 셈이다. 삼성전기의 장기공급계약(LTA)은 5월 이후 공시 기준 7건, 누적 4.3조원까지 쌓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FC-BGA 리드타임은 통상 12주에서 48~56주까지 늘어났고(하나증권 추산), 삼성전기 기판 가동률은 2026년 상반기 89%, LG이노텍은 94%로 알려졌다. 서버용 FC-BGA는 PC용보다 면적이 4배 이상 크고 층수는 20층 이상으로 2배가 넘는데, 만들 수 있는 업체는 세계에 손가락으로 꼽는다. 고객이 공장에 돈을 대서라도 캐파를 '찜'해야 하는 시장, 그것이 지금의 ABF 기판이다. 이 구조를 이해하려면 기판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 물건인지부터 봐야 한다.
1장. 기판은 '패키지 안의 메인보드'다
반도체 다이는 그 자체로는 세상과 대화할 수 없다. 다이 위의 연결 패드 간격은 수십 마이크로미터(µm) 단위이고, 메인보드의 배선 간격은 수백 µm에서 밀리미터 단위다. 세 자릿수(order) 가까이 벌어진 이 간격을 메우는 번역기가 패키지 기판이다. 기판이 하는 일은 네 가지다.
첫째, 팬아웃(fan-out). 칩의 미세한 연결 수만 개를 바깥쪽으로 펼쳐 보드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간격으로 재배선한다. AI 가속기 패키지에서 기판이 처리하는 신호는 수천 개를 넘어 수만 개 수준으로 늘었다.
둘째, 전력 배송(power delivery). 1,000W를 넘나드는 전력을 낮은 전압·대전류로 칩에 넣어야 한다. 전압이 1V 안팎인데 전류가 1,000A급이면, 기판 내부의 저항 성분이 만드는 전압 강하(IR drop)와 노이즈가 곧 성능이다. 삼성전기가 기판 안에 MLCC와 실리콘 커패시터를 박는 이유가 여기 있다. 디커플링 커패시터를 칩에서 수 밀리미터가 아니라 수백 µm 거리까지 당기면 전력 노이즈가 줄어든다.
셋째, 신호 무결성. NVLink와 SerDes 신호는 수십~수백 Gb/s로 기판을 통과한다. 절연 재료의 유전율(Dk)과 유전손실(Df)이 신호 손실과 왜곡을 결정한다. ABF 필름이 하이엔드에서 표준이 된 물리적 이유 중 하나가 낮은 유전손실과 매끄러운 표면(구리 배선과의 밀착, 표피효과 손실 저감)이다.
넷째, 기계적 지지와 열의 길. 리플로(reflow) 솔더링은 약 250°C까지 올라간다. 이 온도를 견디며 수만 개 범프 연결이 끊어지지 않게 패키지를 평평하게 붙잡는 것도 기판의 일이다. 뒤에서 보듯 이 네 번째 일이 지금 가장 먼저 한계에 닿고 있다.
정리하면 기판은 부품이 아니라 패키지 내부에 들어간 또 하나의 메인보드다. 칩이 커지고 빨라지고 뜨거워질수록, 이 '안쪽 메인보드'의 난이도가 본체를 따라잡고 있다.
2장. ABF 필름의 정체: 조미료 회사의 '비밀 소스'
1996년, 인텔의 의뢰와 1999년의 양산
ABF(Ajinomoto Build-up Film)는 아지노모토의 자회사 아지노모토 파인테크노가 만드는 빌드업 층간 절연 필름이다. 출발점은 1996년, 인텔이 차세대 CPU 기판용 필름형 절연재를 의뢰한 것이다. 당시 절연재는 액체 수지를 바르고 말리는 방식이라 두께 균일도와 이물 관리가 어려웠고, 한 면씩 처리해야 했다. 아지노모토 연구진(현 사장 나카무라 시게오가 당시 연구자였다)은 이를 필름 형태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1999년 펜티엄 III용으로 양산이 시작됐다. 진공 라미네이션으로 기판 양면에 필름을 한 번에 붙이는 방식은 공정을 단순화했고, 바니시(varnish)를 필름에 코팅해 '냉동 상태로 출하'하는 발상은 식품 회사다운 제조 노하우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미노산 화학에서 출발한 회사가 반도체 재료의 정점에 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 ABF의 핵심은 에폭시 수지와 경화제, 무기 필러(filler) 입자 등 10종 이상의 원료를 균일하게 섞는 배합 기술이다. 회사 내부에서 '비밀 소스(secret sauce)'로 불리는 이 배합은 유기물과 무기물을 균일하게 분산시키는 기술로, 식품 연구에서 축적한 혼합·분산 노하우와 맞닿아 있다. 배합이 곧 성능이다. 유전 특성, 열팽창, 레이저 가공성, 구리 밀착성은 전부 이 배합에서 갈린다.
물성으로 보는 ABF
| 항목 | 대표 수준 | 왜 중요한가 |
|---|---|---|
| 시장 점유율 | 95% 이상 (회사 발표 기준) | CPU·GPU급 빌드업 필름의 사실상 단일 공급 |
| 유전율 (Dk) | 약 3.2~3.5 | 낮을수록 고속 신호의 지연·손실 감소 |
| 배선 미세화 | Line/Space 5µm급 (SAP 공정) | 서브스트랙티브 한계 75µm → SAP 15µm → 현재 5µm급 |
| 제품군 | GL(저손실), GX(표준), GZ(저열팽창) 등 | 고객·용도별 맞춤 그레이드가 오히려 락인을 강화 |
| 공급 형태 | 롤(roll) 필름 | 기판 업체가 라미네이션해 빌드업 층으로 사용 |
주목할 것은 그레이드 전략이다. 아지노모토는 고객별로 최적화된 그레이드를 함께 개발한다. 기판 업체 입장에서는 필름을 바꾸는 순간 라미네이션 조건, 레이저 조건, 도금 조건을 전부 다시 잡아야 하고, 최종 고객(팹리스·하이퍼스케일러)의 인증도 다시 받아야 한다. 인증에만 18~24개월이 걸리는 이 구조에서, 배합 노하우보다 더 단단한 해자는 '바꿀 수 없음' 그 자체다. 경쟁사 세키스이화학이 SAP 호환 필름을 양산하는 유일한 대안으로 꼽히지만 점유율은 한 자릿수 초반에 머문다.
반도체 전체를 다룬 반도체 완전 가이드에서도 패키징을 성능의 절반으로 다뤘는데, ABF는 그 패키징의 가장 밑바닥에서 27년째 교체되지 않은 재료다. 트랜지스터는 27년간 수천 배 미세해졌지만, 그 밑의 필름은 한 회사가 계속 공급한다.
3장. FC-BGA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8단계 사이클의 반복
ABF 기판(FC-BGA)의 제조는 한 번의 공정이 아니라 사이클의 반복이다. 중심에는 유리섬유 직물(글라스 클로스)에 수지를 함침한 코어 기재가 있고, 그 양면에 빌드업 층을 한 층씩 쌓는다. 표기법부터 알아두자. '10-X-10'은 코어 양쪽에 빌드업 10층씩, 총 20층 안팎의 구조를 뜻한다. 이비덴 로드맵 기준으로 AI 서버 기판은 2026년 10-X-10에서 2028년 12-X-12, 2030년 14-X-14로 간다.
- 코어 제작: 글라스 클로스와 수지로 만든 동박적층판(CCL)에 구멍을 뚫고 도금해 코어 배선을 만든다. 코어의 강성과 열팽창이 기판 전체의 휨을 좌우한다.
- 라미네이션: ABF 필름을 진공 라미네이션으로 붙인다. 기포 하나가 불량이다.
- 경화(curing): 열로 필름을 굳혀 절연층으로 만든다.
- 레이저 비아: CO₂ 또는 UV 레이저로 수십 µm 지름의 미세 구멍(마이크로비아)을 뚫어 층과 층을 이을 길을 낸다.
- 디스미어(desmear): 레이저 열로 탄 수지 잔사를 화학적으로 제거한다. 이 단계가 부실하면 도금이 붙지 않는다.
- 시드 도금: 무전해 도금으로 얇은 구리 씨앗층을 입힌다.
- SAP 패턴 형성: 포토리소그래피로 회로 패턴을 만들고, 필요한 곳에만 전해 도금으로 구리를 키우는 semi-additive process(SAP)로 미세 배선을 만든다. ABF의 매끄러운 표면이 이 공정을 가능하게 했다.
- 검사 후 반복: 전기 검사와 광학 검사를 통과한 패널만 다음 층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2번으로 돌아간다. 층수만큼.
이 사이클 구조가 수율의 산수를 잔인하게 만든다. 층마다 수율이 99%라도 24층을 쌓으면 완제품 수율은 0.99의 24제곱, 약 79%다. 층당 97%면 약 48%까지 떨어진다. 한 층이라도 실패하면 그때까지 쌓은 패널 전체가 폐기되고, 폐기되는 것은 필름만이 아니라 이미 투입된 모든 공정 시간과 장비 캐파다. 그래서 '명목 캐파'와 '유효 캐파'는 전혀 다른 숫자다. 층수가 늘어날수록 두 숫자의 간격이 벌어진다.

같은 이유로 증설 발표를 읽을 때는 세 가지를 할인해야 한다. 장비가 들어오는 시간, 수율이 잡히는 시간, 고객 인증이 끝나는 시간. 유니마이크론 회장은 2026년 10월 20일 대만 TPCA 행사에서 핵심 장비 리드타임이 30개월에 달하고 장비의 80% 이상이 지연되고 있다고 말했다. 공장을 짓는 것보다 장비가 늦고, 장비보다 수율이 늦고, 수율보다 인증이 늦다.
4장. 수요 폭발의 산수: 면적 × 층수 = 필름 10배
ABF 수요는 칩 출하량만으로 계산할 수 없다. 기판 1장이 먹는 필름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지노모토의 2025 통합보고서가 제시한 분해가 가장 명확하다. 대형 AI 기판은 일반 기판 대비 면적 약 3.5배, ABF 층수 약 3배, 그래서 필름 소비량은 약 10배다.
면적의 증가는 패키징 로드맵이 강제한다. TSMC CoWoS는 양산 기준 약 3.3 레티클(reticle) 크기에서 2026년 5.5 레티클, 2027년 9.5 레티클, 2029년 14 레티클 이상으로 커지는 로드맵이 제시돼 있다. 이비덴의 기판 크기 로드맵도 2026년 90×90mm에서 2028년 110×110mm, 2030년 130×130mm 이상으로 향한다. 업계 추정으로 엔비디아 루빈(Rubin) 세대 기판은 블랙웰 대비 약 40% 커지고 층수는 14층에서 18층으로 늘며, 루빈 울트라에서는 기판 평균판매가격이 루빈 대비 50% 이상 오를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비덴이 수요를 '기판 장수'가 아니라 'SAP 공정 부하'로 세는 이유가 여기 있다. 기판 1장이 공장 장비를 점유하는 시간이 2024년 대비 2026년 1.8배, 2028년 2.5배가 되면, 공장을 2배로 늘려도 시장은 더 타이트해진다. 공급망 분석들이 기판 면적 수요의 연평균 성장률을 2025~2028년 약 39%로 잡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출하 대수가 아니라 '면적 × 층수 × 공정 시간'이 진짜 수요다.
여기에 수요처의 확장이 겹친다. GPU와 커스텀 ASIC(구글 TPU, AWS 트레이니엄 등)에 더해 서버 CPU가 에이전트 시대의 병목으로 부상했고, 테슬라의 자율주행·로봇용 칩까지 FC-BGA 수요 대열에 섰다. 10월 22일 보도에서 테슬라가 삼성전기 전용 라인의 고객으로 등장한 것은 상징적이다. 기판 쟁탈전이 데이터센터 밖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5장. 물리의 벽: 휨(warpage)이라는 이름의 한계
기판이 커질수록 먼저 부딪히는 것은 장비도 돈도 아닌 열팽창이다. 패키지는 약 250°C의 리플로 공정에서 결합되고 상온으로 식는다. 그런데 패키지를 이루는 재료들은 온도에 따라 늘어나는 비율(열팽창계수, CTE)이 전혀 다르다. 실리콘은 약 2.6ppm/°C, 구리는 17, 유기 코어는 14~17, ABF 필름 단독으로는 30 안팎까지 거론된다. 식으면서 서로 다른 속도로 줄어드는 재료들이 하나의 패키지 안에서 서로를 당기면, 기판은 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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휨이 치명적인 이유는 정밀도의 요구 수준 때문이다. CoWoS 패키지의 마이크로범프 피치는 40~55µm 수준이고, 접합이 성립하려면 패키지 전면에 걸쳐 평탄도가 수십 µm 안에 들어와야 한다. 업계에서는 유기 기판이 한 변 약 120mm를 넘기면 사용 가능한 평탄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고 본다. 이비덴 로드맵의 2030년 130×130mm는 정확히 그 벽 너머에 있다.
실증 사례도 나왔다. 당초 4개 다이 구성으로 알려졌던 엔비디아 루빈 울트라가 유기 기판의 휨 문제로 구성을 재설계했다는 보도가 업계에서 나왔다. 반대로 기판 제거 자체를 노리는 CoWoP(Chip-on-Wafer-on-PCB) 경로는 수율과 공급망 재편 리스크 때문에 루빈 울트라에서는 채택되지 않고 ABF 기판 유지로 가닥이 잡혔다는 보도도 있다. 즉 엔비디아조차 '기판을 버리는 길'과 '기판을 키우는 길' 사이에서 기판의 물리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휨은 원가 문제가 아니라 설계 자체를 바꾸는 힘이다.
6장. 이중 독점: 필름 안에 또 다른 독점이 있다
ABF 기판의 공급망을 한 층 더 파면 독점 안에 독점이 있다. 기판의 코어를 만드는 글라스 클로스 중에서도 저열팽창 T-glass는 일본 닛토보(Nittobo)가 약 90%를 공급한다. T-glass는 대형 패키지의 치수 안정성을 지키는 핵심 소재로, 대체재(E-glass)로는 AI급 스펙을 맞추기 어렵다. 2026년 들어 T-glass 가격은 20~30% 올랐고, 동박적층판 리드타임은 통상 8~10주에서 20주 이상으로 늘었으며, 일부에서는 공급자가 리드타임 제시 자체를 멈췄다는 전언까지 나온다. 닛토보는 후쿠시마 공장 증설로 대응 중이지만 신규 물량이 시장에 닿는 것은 빨라야 2027년 중반이다. 용해로가 1,600~1,700°C로 도는 특수 유리 제조는 켜고 끄는 스위치가 아니다.
정리하면 AI 패키지 하나에는 두 개의 일본 단일 공급자가 겹쳐 있다. 절연 필름은 아지노모토 95% 이상, 코어용 저열팽창 유리섬유는 닛토보 약 90%. 기판 업체가 아무리 공장을 늘려도, 필름과 T-glass 중 하나만 막혀도 라인은 선다. 2026년 5월 아지노모토가 3분기부터 ABF 필름 가격을 약 30% 인상한다고 기판 업체들에 통보한 것(대만 언론 보도), 그리고 중국향 필름 출하를 줄였다는 보도는 이 구조의 가격 결정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필름 가격 30% 인상이 완제품 기판 가격에 미치는 직접 전가는 3~6% 수준으로 추정되지만(대만 상업시보), 진짜 효과는 그다음에 온다. 기판 업체들의 자체 가격 인상이다. 킨서스(Kinsus) 기준으로 ABF 기판 가격은 2026년 상반기 약 5%, 하반기 최대 7% 추가 인상이 거론됐고, GPU용 기판 평균판매가격은 2024년 65달러에서 2025년 82달러로 올랐다는 시장조사 추정이 있다.
아지노모토의 대응 속도도 구조를 말해준다. 필름 캐파는 2026년 2분기 월 약 200만㎡ 수준에서 풀가동 중으로 알려졌고, 군마 신규 공장은 2025년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2023년 이후 약 250억 엔을 투자했고 2030년까지 같은 규모 이상을 더 투자해 캐파를 50% 이상 늘리는 계획이다. 그런데 바니시 생산의 세 번째 거점은 2026년 5월에야 부지 계약이 체결됐고, 착공 2028년, 가동은 2032년이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반도체 재료 중 하나의 공급 곡선이 '6년 뒤에나 꺾이는' 그림인 것이다. 대안을 찾는 움직임도 있다. 미국 스타트업 틴트로닉스(Thintronics)는 2026년 7월 미 상무부와 최대 5,000만 달러의 CHIPS R&D 인센티브 의향서를 맺었고, 중국의 화정(Huazheng) CBF 등 국산 필름은 인증 단계에 있다. 다만 인증 18~24개월의 벽 앞에서, 이들은 2020년대 후반의 변수일 뿐 현재의 답은 아니다.
7장. 공급갭 전망: 숫자는 달라도 방향은 같다

모건스탠리의 최신 수급 모델은 2026년 대체로 균형, 2027년 9.3% 부족, 2028년 13.7% 부족이다(기존 전망 6.2%, 9.4%에서 상향). 가격에 대해서는 2027년 인상률이 25%를 넘을 것으로 보며, 2026년 인상이 원재료 전가 성격이었다면 2027년 인상은 수급 자체가 만든다는 구분을 달았다. BofA는 더 비관적이다. 2026년 7%, 2027년 14%, 2028년 19%의 부족을 제시했고, 대만 기판 3사의 2026년 2분기 매출총이익률 개선을 '판매자 시장'의 첫 증거로 꼽았다. 일부 공급망 분석은 2028년 부족률을 40%까지 열어둔다.
전망이 이렇게 벌어지는 이유는 분모의 정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명목 캐파로 계산하면 갭은 작아지고, 층수와 면적을 반영한 유효 캐파(SAP 부하 기준)로 계산하면 갭은 커진다. 어느 쪽이든 공통분모는 셋이다. 신규 캐파의 본격 가동은 대부분 2028년 하반기~2030년에 몰려 있고, 그 전까지 수요의 기울기(면적 × 층수)가 공급의 기울기를 앞지르며, 가격 결정력은 공급자에게 있다. 유니마이크론 회장이 TPCA에서 제시한 비교가 이를 압축한다. 2024년 대비 2028년 CoWoS 캐파는 6.8배, 하이퍼스케일러 설비투자는 6.3배로 느는 동안 IC 기판 캐파는 2배, DRAM 캐파는 1.8배에 그친다는 것이다. 패키징의 앞단과 뒷단이 6배로 뛰는데 그 사이를 잇는 기판은 2배다.
다만 이 숫자들은 어디까지나 모델이다. 반도체 가격 전망이 왜 자꾸 틀리는지 실측한 글에서 확인했듯, 전망의 점(点)추정치보다 방향과 조건을 읽는 것이 맞다. ABF에서 조건은 명확하다. 갭이 좁혀지려면 ①발표된 증설이 일정대로 램프하고 ②신규 라인의 수율이 빠르게 잡히고 ③AI 가속기의 면적·층수 증가가 둔화해야 한다. 셋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갭은 전망보다 커지는 쪽으로 틀린다.
8장. 기판사 과점과 한국의 자리
필름이 독점이라면 기판 제조는 과점이다. 하이엔드 FC-BGA 시장점유율은 이비덴 약 35%, 신코(Shinko) 약 18%, 유니마이크론 약 14% 수준으로 추정되고(업계 추정치), AT&S, 난야PCB, 킨서스, 삼성전기, LG이노텍이 뒤를 잇는다. 이 과점의 본질은 설비가 아니라 수율과 인증의 축적이다. 20층 이상 대형 기판을 엔비디아·AMD·구글의 인증을 통과해 양산하는 능력은 돈으로 사는 데 최소 3~4년이 걸린다.
한국의 카드는 두 장이다. 첫째, 삼성전기의 '기판+α' 융합이다. MLCC와 실리콘 커패시터를 기판에 내장하는 능력은 세계 기판 업체 중 삼성전기만 가진 조합이고, 이번 엔비디아 계약의 기술적 명분이 됐다. 6.78조원 투자에 고객 자금 3.7조원이 붙은 구조는 과거 기판 사업에서는 없던 일이다. 삼성전기의 패키지솔루션 사업부는 2026년 상반기 매출 1조 4,970억원(전년 동기 대비 +41%), 영업이익 1,602억원(+237%)을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둘째, LG이노텍의 베트남 하이퐁 거점이다. 가동률 94%로 알려진 FC-BGA 라인의 확장은 원가와 지정학 분산을 노린다.
그러나 한국의 병목도 분명하다. 필름(아지노모토)과 T-glass(닛토보)라는 두 개의 단일 공급자가 모두 일본에 있다. 삼성전기가 유리기판 코어에서 스미토모화학그룹과 손잡은 것(아래 9장)도 결국 소재 단의 일본 의존을 일본과의 합작으로 관리하는 전략이다. 기판 캐파의 국산화는 진행형이지만, 소재의 국산화는 아직 출발선이다. 두산전자 등 국내 동박적층판 업체와 소재 업체들이 T-glass 대체와 저유전 소재에서 얼마나 빨리 인증을 받느냐가 한국 기판 산업의 진짜 숙제다.
9장. 유리기판: ABF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니다
유리기판(glass substrate)을 둘러싼 가장 흔한 오해는 '유리가 ABF를 대체한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이렇다. 유리기판이 바꾸는 것은 기판의 중심인 '코어'다. 유기 코어를 유리 코어로 바꾸면 열팽창을 실리콘에 가깝게 맞출 수 있고(관통 비아 TGV 포함), 표면이 평평해 더 미세한 배선과 더 큰 패키지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유리 코어 위아래에 쌓는 빌드업 층의 절연재는 여전히 ABF 필름이다. 유리는 아지노모토의 고객이지 적이 아니다. 오히려 패키지가 130mm 이상으로 커지면 필름 소비는 더 늘어난다.
| 주체 | 로드맵 (2026-10-23 기준 공개 정보) | 비고 |
|---|---|---|
| SKC 앱솔릭스 | 미국 조지아 코빙턴 공장($600M 규모), 2026년 1월 샘플 출하 시작 | AMD 평가 진행 보도, 2단계 확장 재검토 보도도 병존 |
| 삼성전기 (GlaSSEM) | 동우화인켐과 글라스 코어 합작법인 설립 본계약 (2026-07-02), 총투자 4,800억원·삼성전기 지분 66.2%, 2027년 하반기 본격 가동 목표 | 세종 파일럿 라인에서 시제품·고객 평가 병행 |
| 인텔 | 2026년 1월 NEPCON Japan에서 EMIB+유리 기판 샘플 공개, 범프 피치 45µm·2배 레티클급, 미세균열 없는 'No SeWaRe' 달성 주장 | 자체 양산은 2030년 전후, 기술 라이선싱 전환 보도 |
| TSMC | CoPoS 310×310mm 패널 파일럿 2027년, 양산 2028년 하반기 목표 | 유리 코어 상용화는 2030년 이후로 분류하는 분석이 다수 |
일정의 역사가 주는 교훈도 있다. 앱솔릭스의 당초 양산 시점은 2024년 상반기였고, 삼성전기의 유리 로드맵도 신뢰성 일정이 밀렸다는 보도가 반복됐다. 유리 기판의 병목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TGV 가공의 수율, 유리 취급(파손) 공정, 그리고 고객 인증이다. ABF 기판에서 본 것과 정확히 같은 세 가지다. 현실적인 그림은 이렇다. 2020년대는 유기 코어+ABF의 고도화(저손실 그레이드, 저열팽창 코어, 휨 제어)로 버티고, 2030년 전후 유리 코어가 대면적 구간부터 들어오며, 그 위에는 여전히 ABF가 쌓인다. 'ABF의 종말'이 아니라 'ABF가 올라타는 바닥의 교체'다.
Chase's Take: 권력은 필름에 있고, 계약은 그것을 인정했다
첫째, 이 산업의 이익 풀(pool)은 비대칭이다. 아지노모토는 자본집약도가 낮은 소재 독점으로 앉아서 가격을 올리고(2026년 3분기 +30%), 기판 업체들은 수조 원을 쏟아붓고도 수율과 인증에 목을 맨다. 유니마이크론의 매출총이익률이 18개월 만에 11.6%에서 24.8%로 뛴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 마진조차 필름 가격을 정하는 회사의 허락 아래에 있다. 공급망을 볼 때 '누가 캐파를 갖췄나'보다 '누가 없으면 전부 서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ABF 체인에서 그 답은 27년째 한 회사다.
둘째, 엔비디아·테슬라의 공동투자는 HBM에서 본 패턴의 기판판이다. HBM이 장기공급계약과 선급금의 대상이 됐듯, 기판도 '구매'에서 '확보'로 넘어갔다. 주목할 것은 테슬라의 등장이다. 수요처가 데이터센터 GPU에서 자율주행·로봇으로 넓어지는 순간, 기판 쟁탈전은 AI 버블 논쟁과 무관하게 구조화된다. 자동차와 로봇은 출하량이 서버보다 크고 제품 수명은 더 길다.
셋째, 한국의 승부수는 캐파가 아니라 융합과 소재다. 삼성전기의 MLCC 내장은 '기판+α'의 첫 성공 사례다. 같은 논리로, T-glass와 저유전 소재, 동박적층판에서 국내 업체가 인증을 하나라도 따내면 그것은 캐파 증설보다 오래가는 해자가 된다. 반대로 필름과 유리섬유의 일본 의존을 그대로 둔 채 공장만 늘리면, 마진의 상한은 계속 남이 정한다.
넷째, 앞으로 볼 체크포인트는 넷이다. ①10월 27일 유니마이크론 3분기 실적에서 ABF 마진과 수주잔고 코멘트, ②삼성전기 LTA 공시의 누적 속도와 세종 라인 일정, ③아지노모토의 2차 가격 인상과 군마 램프 속도, ④닛토보 증설 물량이 닿는 2027년 중반의 T-glass 수급. 이 넷이 ABF 시장의 다음 12개월을 결정한다.
시나리오
- 기본 시나리오: 2027년 한 자릿수 후반~두 자릿수 공급갭, 기판 가격 두 자릿수 인상, 마진 확대가 2028년 하반기 증설 램프까지 이어진다.
- 강세(공급자) 시나리오: 루빈 울트라급 대면적 수요와 CPO 기판이 겹치고 T-glass가 먼저 막혀, 갭이 BofA 경로(2028년 19%)를 넘어선다. 고객 공동투자가 업계 표준이 된다.
- 약세 시나리오: AI 설비투자 조정으로 선증설이 부담이 되는 경우. 다만 HBM과 달리 기판 수요는 CPU·네트워킹·자동차로 분산돼 있어, 조정이 와도 2021~2023년식 붕괴보다는 '인상 속도 둔화'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FAQ
Q1. ABF 기판이란 무엇인가요? ABF(아지노모토 빌드업 필름)를 절연층으로 쌓아 만든 고성능 패키지 기판입니다. GPU·CPU·AI 가속기 같은 고성능 칩과 메인보드를 연결하며, 미세 배선과 수천~수만 개의 신호·전력 경로를 담당합니다. FC-BGA가 대표 형태입니다.
Q2. 아지노모토는 왜 독점인가요? 1999년 세계 최초로 필름형 빌드업 절연재를 양산했고, 10종 이상 원료의 배합 노하우와 고객별 그레이드 공동개발로 락인을 만들었습니다. 대체 필름을 써도 기판 업체의 공정 재설정과 최종 고객 인증에 18~24개월이 걸려, 점유율 95% 이상이 27년째 유지되고 있습니다.
Q3. ABF 공급난은 언제 풀리나요? 기관 전망은 2027년 9~14%, 2028년 14~19%의 공급 부족으로 수렴합니다. 신규 캐파의 본격 가동이 2028년 하반기~2030년에 몰려 있어, 그 전까지는 타이트한 시장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닛토보 T-glass 증설이 닿는 2027년 중반이 첫 번째 완화 신호입니다.
Q4. 유리기판이 나오면 ABF는 사라지나요? 아닙니다. 유리기판은 기판의 코어만 유기 소재에서 유리로 바꾸고, 그 위의 빌드업 절연층은 여전히 ABF 필름을 씁니다. 유리 코어 상용화 일정도 대부분 2027~2030년에 걸쳐 있어, ABF 수요는 오히려 패키지 대형화와 함께 늘어나는 구조입니다.
Q5. 엔비디아와 테슬라는 왜 삼성전기에 투자하나요? FC-BGA 리드타임이 48~56주까지 길어지고 만들 수 있는 업체가 손에 꼽히기 때문입니다. 2026년 10월 21일 양사는 전용 라인 공동투자와 다년 공급을 공식 발표했고, 로이터 보도 기준 엔비디아 약 2.6조원·테슬라 약 1.1조원의 고객 자금이 세종 증설을 뒷받침합니다. 기판을 시장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공장을 함께 지어 캐파를 확보하는 방식입니다.
Q6. T-glass는 무엇이고 왜 병목인가요? 기판 코어에 들어가는 저열팽창 유리섬유 직물로, 대형 패키지의 휨을 잡는 핵심 소재입니다. 일본 닛토보가 약 90%를 공급하는데 증설 물량이 2027년 중반 이후에나 닿아, ABF 필름과 함께 이중 병목을 이룹니다.
Q7. 투자 관점에서 무엇을 봐야 하나요? 기판 업체의 마진 추이(ABF 비중과 가격 인상 전가), 고객 LTA·공동투자 공시, 아지노모토와 닛토보의 가격·증설 발표, 그리고 분기 실적에서 드러나는 수율 코멘트입니다. 전망 수치는 기관마다 벌어지므로 점추정보다 방향과 조건으로 읽어야 합니다.
본 글은 2026년 10월 23일 기준 공개된 기업 발표와 보도를 바탕으로 한 분석이며,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기관 전망치와 업계 추정치는 출처를 본문에 표기했고, 확인되지 않은 수치는 추정치로 구분했습니다.
Sources
- 삼성전기-엔비디아 전략적 파트너십 발표 (2026-10-21): https://www.thelec.kr/news/articleView.html?idxno=64086
- Reuters — SEMCO, Tesla·NVIDIA로부터 3.7조원 투자 유치 보도 (2026-10-22): https://www.channelnewsasia.com/business/samsung-electro-mechanics-gets-28-billion-chip-investment-tesla-nvidia-report-says-6481841
- ChosunBiz — 빅테크의 삼성전기 국내 증설 자금 지원 (2026-10-22): https://biz.chosun.com/en/en-it/2026/10/22/SG2GD2JAY5CRXBVX7U3I4N6VZ4/
- Morgan Stanley ABF 수급·가격 전망 (2026-10): https://longbridge.com/en/news/301862838
- Tom's Hardware 계열 딥다이브 — ABF 기판의 공급난과 소재의 벽 (2026): https://news.lavx.hu/article/abf-substrates-in-data-center-silicon-solving-the-supply-crunch-beneath-every-ai-accelerator
- 삼성전기-스미토모 글라스 코어 합작법인 (2026-07-02): https://en.infomaxai.com/news/articleView.html?idxno=128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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